구글 삭제 요청 노출 사건은 “명백한 구글의 실책”
디지털 성범죄 해외 공조 확대·수익구조 차단 강조
“피해자 지원은 사람의 일” 종사자 급여 정상화도 과제
“지금보다도 더 신뢰받는 기관으로 만들겠다”
박광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은 취임 후 크게 놀란 점으로 진흥원이 맡은 일의 방대함을 꼽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부터 디지털 성범죄를 포함한 여성폭력 대응까지, 여성폭력의 역사와 현장을 한 기관이 아우르고 있다는 것이다.
박 원장은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한 후 2003년 여성신문 편집국장을 거쳐 국회의원 보좌관, 마인드프리즘 부사장,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등을 지냈다. 2020년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여성학 전문가이기도 하다. 언론, 정치, 문화 등 다양한 현장에서 경험을 쌓은 그는 지난 8월 4일 원장으로 취임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은 여성폭력을 방지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성평등가족부 산하의 공공기관으로, 여성폭력 피해자 보호·지원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연구 등 사업을 진행한다. 여성긴급전화1366 중앙센터와 중앙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중앙디성센터), 일본군'위안부' 문제연구소 역시 운영하고 있다.
박 원장은 8일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피해자 지원 체계 곳곳의 '공백'을 메우겠다고 했다. 디지털 성범죄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국제 공조를 강화하고, 피해자 지원을 떠받치는 사람들의 소진 문제도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 원장은 이런 노력으로 피해자들이 가장 먼저 찾을 수 있는 "더 신뢰받는 기관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디지털 성범죄 막으려면 "수익구조부터 끊어야"
최근 진흥원 안팎에서 가장 큰 현안은 '구글 피해자 삭제 요청 유출 사건'이었다. 국내 피해자지원기관이 구글에 제출한 디지털 성범죄 피해 영상물 삭제 요청이 해외 연구기관인 'ㄹ 연구기관'에 공개적으로 노출된 일이다. 8월 25일 이를 확인한 진흥원은 구글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해외 기관 및 플랫폼 사업자와 공동 대응에 나서 구글로부터 재발 방지 확약을 받았고, 정보 유출을 확인한 뒤 중단했던 삭제 요청을 재개했다.
박 원장은 이 사건을 "구글의 명백한 실책"이라고 평가했다. 구글이 관리해야 했던 보안 장치가 문제가 되면서 피해자 정보가 공개적인 플랫폼에 노출됐다는 설명이다. 박 원장은 "향후 구글에 대한 책임 문제는 지속될 것"이라며, 책임 방식과 재발 방지, 피해 보상을 두고 논의가 오갈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이번 사례로, 국내 기업과 달리 해외 기업에는 압박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한계가 드러났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박 원장은 국제 공조 강화를 위해 인호프(INHOPE) 가입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호프는 온라인에 유포된 아동 성착취물을 근절하기 위해 설립된 글로벌 핫라인 네트워크다. 전 세계 53개국에 58개의 핫라인을 두고 있어, 인호프를 통하면 성착취물 삭제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박 원장은 디지털 성범죄 대응에서 호스팅 업체 폐쇄·삭제 건수 등에 그치지 않는 '근본적 성과'를 추구해야 할 필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디지털 성범죄 영상물이 유통되는 불법사이트가 도박·마약 유통과 연결된 경우가 많다. 디지털 성범죄는 결국 성산업과 연결된 수익구조로 일어나는 범죄 양태"라며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해서는 수익구조부터 끊어야 한다"고 밝혔다.
피해자 지원은 결국 '사람의 일'
박 원장은 진흥원 직원들에 대해 "놀랍도록 헌신적인 전문가들"이라고 불렀다. 특히 오랜 기간 현장을 지켜왔던 1366 상담사들에 대해서는 "이 '언니들' 덕분에 사람들이 살았구나 싶을 정도로 역량이 있는 분들"이라며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이들의 처우를 말할 때는 마음이 무거워진 듯했다. 박 원장은 임기 내 진흥원 직원들의 급여를 다른 산하기관 수준으로 정상화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꼽았다.
종사자의 소진은 피해자 지원의 질과 곧바로 이어지는 문제다. 하지만 해바라기센터·여성긴급전화1366·중앙디성센터 등 진흥원 현장 종사자의 낮은 처우와 인력 문제는 꾸준히 지적돼 왔다. 실제 진흥원의 급여 수준은 성평등가족부 6개 산하기관 중 가장 낮다. 박 원장은 "종사자들이 초인적인 일을 하고 있다"면서도 "이들의 소진 방지를 위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원장은 피해자 지원이 '사람의 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기술 고도화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디지털 성범죄물 삭제 지원도 마찬가지다. 기술 고도화로 삭제의 속도는 높일 수 있지만, 여전히 사람이 판단할 문제가 많다. 법률·수사를 지원하고 피해자 곁에 있어주는 것 역시 사람의 일이다. 그러나 박 원장은 "관심과 예산이 기술 고도화에만 쏠리는 경우가 많다"며 인력 지원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
"안전하고, 찾아가면 뭐라도 되는 진흥원을 만들겠다"
박 원장은 "피해자 지원의 핵심은 피해자가 일상으로 잘 돌아가도록 돕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박 원장은 담론 활성화와 인식 개선에도 관심이 크다고 했다. 불에 데면 상처가 남듯 피해는 흔적을 남기지만, 그 흔적을 안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는 주변과 사회의 태도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인구 절반 이상에 대한 폭력"이라며, 여성폭력 이야기를 꺼내면 곧바로 '젠더 갈등'이라는 반응이 돌아오는 현실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박 원장은 "한 사람이라도 더 손을 잡는 게 중요하다"며 담론 활성화와 함께 진흥원이 하는 의미 있는 일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신뢰를 높이고 싶다고 밝혔다. 최근 형사사법체계가 대대적으로 개편되며 피해자들이 느끼는 불안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며, "피해자들이 안심할 수 있는 방향으로 길을 찾겠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임기를 마친 뒤 진흥원이 어떤 곳으로 기억되길 바라느냐는 질문에는 "피해가 있을 때 진흥원에 연락하면 안전하고, 찾아가면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곳"이라고 답했다.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에 믿고 찾을 수 있는 곳이 되겠다는 뜻이다. 박 원장은 "지금도 그렇지만 더 신뢰받는 한국여성인권진흥원으로 만들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