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마이 네임』
샤넬 밀러 지음, 성원 옮김, 동녘 펴냄
미국 코넬대 성폭력 사건의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 코넬대 학생 자치 언론 '더 코넬 데일리 선'은 코넬대 재학생이었던 한 여성이 2024년 10월 교내 남학생 사교 클럽 '카이 파이' 소속 남학생 7명에게 강제 약물 복용에 이은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며 지난달 이들과 학교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여성은 스무살이었고, 사건 이후 학교를 떠났다. 코넬대는 가해자 7명 중 2명에게만 퇴학 조치를, 나머지는 정학과 반성문 제출 같은 가벼운 처벌을 내렸다. 해당 여성은 익명의 피해 여성에게 붙이는 이름인 '제인 도'(Jane Doe)로 불렸고, 여성들이 연대해 "내가 제인 도"라고 외치고 있다.
제인 도 이전에는 에밀리 도가 있었다. 2016년 미국 스탠퍼드대 캠퍼스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샤넬 밀러다. 4년간 익명의 피해자 '에밀리 도'로 살았던 샤넬은 2019년 책 '디어 마이 네임'을 내며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다. 샤넬과 제인의 사건 모두 남학생 사교 클럽과 연관이 있으며, 둘다 술을 마시곤 기억을 잃었다. 스웨덴 남성 두 명에 의해 발견됐을 때 그는 야외에 있는 대형 쓰레기통 뒤편 땅바닥에서 반라의 상태였다. 가해자 브록 터너는 스탠퍼드 장학생이자 '전도 유망한' 수영 선수였다.
『디어 마이 네임』은 '사건 그 후'에 관한 샤넬의 회고록이다. 사건이 언론 지상에 알려지고. 뜻밖에 화살은 가해자보다 피해자인 샤넬을 향해 날아들었다. 스탠퍼드 출신도 아니고, 대학 졸업생인데 "왜 파티에 갔느냐"는 식이었다. 가해자 브록이 '아까운 젊은이'로 둔갑, 뭇 대중들의 공감을 산 것과는 양상이 달랐다. 샤넬은 남학생 사교클럽 파티는 그렇고 그런 곳으로 치부되며, 그곳에 들어간 여자는 사자 소굴에 들어간 양처럼 비유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사자는 야생 동물'이지만, '남학생은 인간'이다. 사자가 아닌 인간 남자의 행동은 상수로 인정받지만, 여자는 알아서 대처해야 했을 변수로 취급되는 일에 샤넬은 분노했다. 달리 말하면 남자들의 강간 문화와 여자들의 처지는 상수이다. 다만 이를 마주하는 여자들의 대처만 '요령껏'이라는 변수의 세계에 있다. 그것이 대학이라는 교육기관에서도 버젓이 통용되며 확대 재생산됨을 온몸으로 알리는 이들이 샤넬과 제인이다.
샤넬이 법정에 서자, 공격은 한층 더 매서워졌다. 본디 주량이 얼마인지, 파티에 자주 가는 '파티 피플'이었는지, 현재 남자 친구가 있는지 같은 매우 사적인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강간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피해자다움'이라는 편견에 적극 부합해야 하는 것이 또 피해자의 몫이었다. 그는 사실대로 답변을 이어가면서도, 이러한 구조에 의문을 제기한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내 몸을 만지는 걸 원치 않았다"라는 말만으로 충분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애인의 존재가 '합의된 관계'였다는 가해자 측 주장을 뒤집는데 유효하게 작동하는 거라면, 애인이 없는 피해자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끝내 샤넬은 반문한다. "자율성이 존중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남자친구를 갖는 것뿐인가?"(112쪽)
긴 법정 투쟁이 이어졌지만, 결국 가해자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가 그마저도 3개월로 감형됐다. 그 사이 샤넬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고, 동네를 산책하는 소소한 일에서 마저 또 다른 위협이나 보복을 상기하며 멀어져 갔다. 샤넬의 가족들과 애인은 업무와 학업을 희생해가며 법정 증언대에 서야 했다. 한편, 스탠퍼드대에서는 사건 직후의 전화 한 통 외에 아무 연락이 없었다. 2년이 지나서야 "(외부인에 관한) 규정이 없었다"며 사과와 함께 상담치료 비용을 지불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게 전부였다.
샤넬이 말하듯, 학내 성폭력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와 학생 사회의 태도다. 그는 대학의 '책임지는 태도'가 중요하며, 그러한 태도에는 치유력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투명성에서 온다. 사건을 평온한 학교에서 일어난 불명예로 여기지 않고, 구조적인 성차별과 강간 문화에서 비롯된 문제임을 천명하는 것. 이를 방관한 교내 시스템과 학생 문화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공동체의 이름으로 징계와 예방에 관한 구체적인 대안을 세우는 것이다. 그게 안 돼서 학내에서 사건 해결을 원했던 피해자조차, 결국 수사 기관의 문을 두드린다.
더 코넬 데일리 선과의 인터뷰에서, 제인은 말했다. "사건 이후 학생 사회로부터 받은 지지가 부족해서 매우 실망스러웠다"고. "이미 겪은 일 자체가 참담했지만, 가장 동정과 지지, 보살핌이 필요했던 시기에 비난과 따돌림을 당하면서 고통이 더욱 커졌다"고. 코넬대는 사건 발생 5개월 뒤에야 태스크포스(TF)를 꾸렸고, 2년 후인 최근에야 독립적인 진상 조사에 들어갔다. 학교가 늦장 대응을 이어간 데는 학생 사회의 무관심과 피해자를 향한 비난도 한몫했을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동급생을 성폭행한 혐의로 검찰에 송치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남학생 두 명이 학폭 조치도 없이 대학에 진학한 사실이 알려졌다. 한국일보 보도에 따르면 피해 여학생은 사건 이후 결석이 늘었고,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우리네 학교에서 여자들은 그 얼마나 취약한가. 전 세계의 '제인 도'가 강간 문화의 울타리인 학교를 지목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