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숨져도 "결격사유 없음"... 주주 외면한 기관투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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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는 누구를 위해 일하나③] 사회적 책임 걸린 이사·감사 선임안 351건, 4430표 전수분석2021년 3월 12일, 포스코 정기 주주총회. 이날 최대 관심사는 최정우 회장의 연임 안건이었다. 2018년부터 그의 첫 임기 3년 동안 포스코 현장에서 일하다 숨진 노동자는 14명이었다. 잇따른 산재 사망사고로 고용노동부 특별감독이 시작되면서, 주총 당일 최 회장은 거센 책임론과 사법 리스크에 직면했다. 반복된 사고가 현장을 넘어 회사의 재무와 사회적 책임 위기로 번진 만큼, 주총 표결은 그의 위험 관리 능력을 검증하는 시험대였다.

ⓒ <오마이뉴스> 자료를 바탕으로 AI 생성이미지

하지만 기관투자자들은 이렇다 할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최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표결에 참여한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기관 19곳 가운데 17곳이 찬성했다. 이들이 공시한 찬성 사유는 이랬다.


반대는 공무원연금공단 한 곳뿐이었다. 국민연금은 '중립'을 택했고,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중립 표결은 나머지 주주들의 찬반 비율대로 표를 쪼개 던지는 방식이라, 결과적으로 최 회장의 손을 들어준 꼴이 됐다. 그날 국민연금이 반대한 안건은 따로 있었다. '이사 보수한도액 승인의 건'이었다.

금융당국 제재 받고, 노동자가 숨져도 '결격'은 없었다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를 평가할 때 흔히 쓰는 잣대는 반대율이다. 반대표를 얼마나 던졌느냐로 적극성을 가늠한다. 하지만 반대율이 높다고 스튜어드십 코드를 충실히 지켰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안건에, 무슨 이유로 표를 던졌는지 함께 봐야 하는 이유다.

<오마이뉴스>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10년을 맞아 진행한 의결권 전수조사와 별도로, '사회적 책임 리스크'가 걸린 이사·감사 선임 안건만 따로 떼어 분석했다. 대상은 2016년 12월 코드 도입 이후 국내 상장사 주총에 오른 이사·감사 선임 안건 가운데, 회사나 후보자의 법 위반·제재·사고 이력이 의결권 행사 사유에 한 번이라도 등장한 351개 안건(136개사)이다. 이를 13개 유형으로 나누고,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기관들이 이 안건들에 던진 4430표를 모두 살펴봤다.
▲  사회적 책임 리스크 유형
ⓒ <오마이뉴스> 자료를 바탕으로 AI 생성이미지

왜 이사·감사 선임 안건일까. 이유는 제도에 있다. 현행 상법은 주주들이 회사의 주인으로서 경영진에게 직접 안건을 내고 주총에서 표결하는 주주제안의 대상을 '법과 정관에 정한 사항'으로 묶어뒀다. 이 때문에 기후위기 대응이나 인권처럼 경영진에게 권고만 하는 권고적 주주제안은 국내에선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기관투자자들은 이사 선임 표결을 '우회로'로 써왔다. 사회적 책임 문제를 기관들이 어떻게 보는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이사 선임 표결인 셈이다.

사회적 책임 문제 생기면 반대 3배 늘어… 장부 문제엔 40%, 사람 목숨엔 12%

<오마이뉴스> 분석결과 사회적 책임 리스크가 걸린 안건에선 반대가 확실히 많았다. 같은 기간 전체 이사·감사 선임 안건에 던져진 9만 9517표 가운데 반대는 8681표, 반대율은 8.7%였다. 반면, 사회적 책임 이슈가 적힌 351개 안건에선 4430표 중 1065표가 반대였다. 이는 반대율 24.0%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체 이사·감사 선임 안건 반대율에 비해 3배 가까이 높은 수치다. 이는 기관들이 사회적 책임 문제를 판단 요소로 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지점이다.
▲  기관투자자는 어떤 리스크에 반대했나
ⓒ <오마이뉴스> 자료를 바탕으로 AI 생성이미지

13개 유형을 하나씩 뜯어보니 반대표는 회삿돈과 장부가 걸린 사안에 몰렸다. 주가조작·미공개정보(43.1%), 횡령·배임(42.2%), 회계부정(39.9%)이 1~3위였다. 내부통제 부실(37.0%), 개인정보 유출(36.0%)이 뒤를 이었다. 금융당국 제재(27.3%)와 공정거래법 위반(25.2%)은 중간쯤이었다. 소비자 피해·불완전판매는 표가 가장 많이 몰린 유형(1686표)이었지만 반대율은 19.5%였다.

반대가 가장 적었던 건 사람의 목숨, 노동, 환경이 걸린 사안이다. 기후·환경(13.6%), 노동·인권(13.3%), 중대재해·산업안전(11.9%) 모두 10%대 초반에 그쳤다. 뇌물·리베이트·정치자금(8.2%)이 꼴찌였다. 특히 중대재해·산업안전은 안건 28개에 506표가 몰렸지만 반대율은 회계부정의 3분의 1에도 못 미쳤다.

기관투자자는 회사에 곧바로 돈 손실을 안기는 문제에 민감했다. 하지만 노동자, 소비자, 환경처럼 회사 밖에서 생기지만 결국 회사로 돌아오는 위험에는 둔감했다.

사고가 아니라 '판결'에 반응한 기관들

기관투자자들은 언제부터 사회적 책임 문제를 이사의 결격사유로 봤을까. 분석해 보니 일정한 패턴이 보였다. 사고나 법 위반이 터졌을 때가 아니었다. 수사와 재판을 거쳐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뒤에야 반대표가 본격적으로 나왔고, 반대 사유도 구체적으로 적혔다.

중대재해가 잇따른 조선업계가 대표적이다. 이상균 HD현대중공업 대표이사는 2020년 5월 조선해양 사업대표로 온 뒤 줄곧 중대재해 논란의 한가운데 있었다. 이듬해인 2021년 울산조선소에서 용접 노동자가 숨졌다. 그는 안전보건관리책임자로 기소돼 2023년 1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재선임 안건이 주총에 오르기 6주 전인 2024년 2월 12일에도 같은 조선소에서 60대 하청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2024년 3월 주총에서 이 안건에 표를 던진 17개 기관 가운데 반대는 7곳(41.2%)이었다. 반대 사유에 사망사고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을 적은 곳은 흥국자산운용 한 곳이었다. 나머지 6곳은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익 침해" 같은 두루뭉술한 문구로 대신했다. 찬성한 10곳은 1심 판결을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올해 주총에선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반대율은 69.0%(29곳 중 20곳)로 뛰었고, 사망사고를 반대 사유로 직접 적은 기관도 13곳으로 늘었다. 그사이 대법원에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에 대한 징역형 집행유예가 확정됐다.
▲  대법원 확정 뒤 반대 69%
ⓒ <오마이뉴스> 자료를 바탕으로 AI 생성이미지

이를 우연으로 보기는 어렵다. 다른 사건들에서 기관들 스스로 그렇게 적었다. 마이다스에셋자산운용은 배임 혐의로 기소된 후보에 대해 "확정판결 전까지는 결격사유가 아니다"라며 찬성했다. 다올자산운용도 금융당국 문책경고를 받은 후보에게 "재판이 진행 중이라 무죄추정 원칙상 반영하기 어렵다"며 찬성표를 던졌다.

같은 일은 올해 다른 조선·철강사 주총에서도 되풀이됐다. 노동자가 숨진 사업장의 대표이사지만 아직 기소되지 않은 3개사의 이사 선임안이다. 반대는 한화오션 17곳 중 3곳(17.6%), 삼성중공업 22곳 중 2곳(9.1%), POSCO홀딩스 23곳 중 2곳(8.7%)에 그쳤다.

하지만 판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 기관 투자자만 있는 건 아니다. 한화오션 안건에서 일부 기관은 다른 판단을 내놨다.


두 기관은 확정판결을 기다리지 않았다. 사고가 났다는 사실, 대표이사의 책임, 그로 인해 앞으로 생길 규제·재무 위험까지 주주가치의 문제로 봤다. 결국 차이는 판결이 나왔느냐가 아니었다. 무엇을 주주가치로, 무엇을 경영진의 책임으로 보느냐였다.

기후·환경 이슈에 반대표, 10년간 사실상 '0'건

기후·환경 문제는 어땠을까. 결과는 더 초라했다. 기후·환경 리스크가 의결권 행사 사유에 등장한 이사 선임 안건 자체가 9개 기업, 10건뿐이었다. 여기 던져진 103표 가운데 반대는 14표(13.6%)였다. 13개 유형 가운데 10위다.

반대 14표 가운데 기후나 환경을 실제 반대 사유로 적은 건 10표뿐이었다. 그마저도 특정 기관, 특정 주총에 몰렸다. 6표는 네덜란드계 자산운용사 로베코(Robeco) 한 곳에서 나왔다. 로베코는 자체 기후 대응 지침에 따라 POSCO홀딩스·두산에너빌리티·GS·HD한국조선해양에는 "기후변화 대응 미흡"을, 오리온과 BGF리테일에는 "산림파괴 리스크가 높은 원자재 노출"을 이유로 반대했다.

나머지 4표는 지난 3월 고려아연 주총 한 건에서 나왔다. 일부 기관이 영풍 측이 추천한 사외이사 후보에 반대하며 환경 문제를 언급했다. 고려아연과 영풍의 경영권 분쟁 와중에 나온 표다. 이를 빼면 지난 10년 동안 국내 기관투자자가 기후·환경을 이유로 이사 선임에 반대한 사례는 사실상 없다.

판단이 보이는 찬성, 보이지 않는 찬성

찬성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회사의 대응과 재발 방지 노력을 따져 찬성할 수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 역시 '결론'이 아닌, 그 결론에 이른 판단 과정을 투자자와 수익자가 확인할 수 있도록 공개하는 데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 분석 결과, 찬성이라도 다 같은 찬성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적고, 그런데도 왜 찬성하는지 밝힌 기관들이 있었다.

NH-Amundi자산운용은 지난해 3월 현대건설 주총에서 안전보건최고책임자(CSO) 출신 사내이사 후보에 대해 이렇게 썼다.


사망사고가 있었다는 사실, 당국 판단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근거, 그래서 찬성한다는 결론,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까지 담겼다.

BNK자산운용도 지난해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선임 안건에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전력을 짚은 뒤 "후보자는 벌금을 모두 납부했고 본인 및 회사가 산업안전보건법 준수여부 관리 강화를 통한 재발 방지 대책을 진행 중"이라며 찬성했다. 키움투자자산운용은 올해 3월 한화오션 주총에서 "다수의 안전사고가 발생하였으나, 2024년부터 2026년까지 약 2조 원 규모의 HSE 투자를 단행하고 대표이사가 참여하는 세이프티 커미티를 주간 단위로 실시하는 등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고려했다"며 찬성했다.

어떤 표를 던졌는지 떠나, 이들은 판단에 이른 과정과 이유를 구체적으로 공개했다. 문제는 이런 사례가 드물다는 점이다. 351개 안건에 던져진 찬성 3213표 가운데 사유가 남아 있는 건 2780표다. 그중 57.8%에는 다른 안건에도 쓰인 문장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사유만 읽어서는 그 안건을 따로 들여다보고 내린 판단인지 알 수 없다.


노동자가 숨진 사업장의 대표이사에게도, 분식회계로 금융당국 제재를 받은 회사의 이사에게도 기관투자자들은 똑같은 문장을 찬성 사유로 적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의결권 행사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사유를 함께 공개"하라고 요구한다.

5년 전 포스코 주총에서 찬성한 17개 기관이 남긴 문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사이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기관은 꾸준히 늘었다. 사회적 책임 리스크가 걸린 안건에 표를 던진 기관도 2019년 23곳에서 올해 61곳으로 2.7배가 됐다. 하지만 이 안건들의 반대율은 2019년 29.8%, 올해 30.2%. 8년째 제자리다.

집사가 늘어나는 것과 집사가 일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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